우리 함께 동학(東學) 하십시다!
#7 유, 불, 선 삼도와 우리 도 (2)
<원문>
이와같은 思想(사상)으로써 人民(인민)을 敎化(교화)하여 子孫萬代(자손만대)의 不要不易(불요불이)의 大經大法(대경대법)을 만들어 놓았었다. 政治(정치), 法律(법률), 制度(제도), 儀式(의식), 宗教(종교), 風俗(풍속), 言語(언어), 文字(문자) 等(등)이 모두 彼(피)와 同化(동화)로 되었음은 勿論(물론)이오, 人姓(인성), 人名(인명), 地名(지명), 物名(물명)까지도 그것을 模倣(모방)하지 아니한 것이 한가지도 없었다. 그것이 人道上(인도상) 正義(정의)라고만 할 것 같으면 어느 것이나 同化(동화)하는 것이 何等(하등)의 關係(관계)가 있으랴마는 그것이 非人本主義(비인본주의)며 不平等 主張(불평등 주장)임에야 어느때 든지 그 人族(인족)이 꿈을 깨는 날에는 한번 다시 뒤집어지고 마는 것이 原則(원칙)일 것이다. 所謂(소위) 朝鮮國家(조선국가) 안에서 人材選拔(인재선발)이라는 것부터 그 글字(자) 만으로써 試題(시제)를 내어 걸고 純全(순전)한 그 式(식)으로, 純全(순전)한 그 사람네의 道德(도덕)이나 政治(정치)나 風俗(풍속)이나 個人(개인)의 이야기꺼리까지라도 그 글속에서만 取(취)해 쓰게 하고, 제것이라고는 무엇이든지 一字半句(일자반구)라도 取(취)해 쓰지 못하게 하였었다.
自國(자국)의 글이라고는 諺文(언문)이오, 假글(가글)이라 하여 世上(세상)에 내 놓고 써 보지도 못하였다. 所謂(소위) 禮文(예문)이라는 것도 純全(순전)한 그 式(식)으로만 되어있어, 사람이 죽으면 個體(개체)의 靈魂(영혼)이 있다하여 魂魄(혼백)을 부르는 等(등), 家祭(가제)나 墓祭(묘제)에 飮食物(음식물)을 차려놓고 欽饔(흠옹)을 빌었으며, 鄕校(향교)나 書院(서원) 等(등)도 모두가 그 模範(모범)으로 하여 上國(상국) 鬼神(귀신)들을 主辟(주벽)으로 내세워 앉혀놓고, 朝鮮(조선)사람의 神位(신위)는 그 下位(하위)에 陪坐(배좌)시켜 놓았으며, 그리하여 子孫萬代(자손만대)의 兩班(양반)질을 잘 해보겠다는 생각으로 그리 한 것이었다.
이밖에도 또 異常(이상)한 일이 많았었다. 忠淸道(충청도) 南端(남단) 한구석에 山(산) 하나가 있어 그 이름을 尼丘山(니구산/이구산/이산)이라고 지었으며, 그 山(산) 밑에 골 이름을 魯城(노성)이라 부르고, 그 고을 北便(북편)쪽에 闕里社(궐리사)라는 집을 지어 孔子(공자)의 畵像(화상)을 그려 붙여놓고 春秋(춘추)로 祭祀(제사)를 지내는 일이며, 淸州(청주) 華陽洞(화양동)에 萬東廟(만동묘)라는 집을 지어놓고 華陽水石(화양수석), 大明乾坤(대명건곤)이라고 大書特筆(대서특필)로 刻字(각자)를 한 일이며, 南陽郡(남양군) 臥龍面(와룡면)에 諸葛孔明祠堂(제갈공명사당)이며, 海州(해주) 首陽山(수양산)에 伯夷叔齋祠堂(백이숙제사당)이며, 京城(경성)에 慕華舘(모화관) 延詔門(연조문)이며, 小地名(소지명)으로 程子川(정자천)과 朱子川(주자천)과 赤壁江(적벽강), 彩石江(채석강) 等(등) 같은 것도 모두 大國化(대국화)한 것임이 틀림이 없는 것이다. 이걸로 미루어 보아 平壤(평양)에 箕子廟(기자묘) 같은 것도 또한 疑心(의심)이 없을 수 없는 것이다.
<현대어>
이러한 사상(유교)은 조선 사회에서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면서, 자손대대로 결코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진리처럼 여겨져 왔다. 유교는 정치, 법률, 제도, 의식을 비롯하여 사람들의 생활 전반에 깊숙이 뿌리를 내렸다. 심지어 사람들의 이름, 지명, 물건 이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중국을 그대로 모방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 모든 것이 인간의 도리상 옳고 바른 것이라고 한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사실은 다른 나라의 것을 무조건 따라하는 모습이었다. 따라서 언젠가 이 민족이 자신의 정체성을 자각하고 깨어나게 되는 날에는, 그 모방한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뒤집어 버리는 것이 자연스러운 결과일 것이다.
조선에서는 인재를 선발하는 것조차 중국에서 들어온 유교적 가치관을 철저히 따르게 했다.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제도나 법률은 물론이고, 개인의 삶과 가치관까지도 모두 중국의 글과 문장 속에서만 배우도록 하였고, 스스로의 경험이나 생각은 단 한 글자도 들어갈 수 없게 만들어 놓았다.
우리 민족 고유의 글이라고는 오직 '언문(한글)' 뿐이었는데, 이를 '가짜 글', '상스럽고 품위 없는 글'이라고 무시하여 세상에 드러내놓고 제대로 사용하지도 못했다. 심지어 의례(禮文)라고 하는 것도 철저하게 중국에서 들여온 방식만을 그대로 따랐다. 사람이 죽으면 개개인의 영혼이 존재한다고 하여 혼백(魂魄)을 불러 제사를 지낼 때에도, 가정에서 지내는 제사나 무덤에서 지내는 제사에서도 모두 중국식으로 음식을 차려놓고 흠향(欽饗)하며 기도했다.
뿐만 아니라 향교(鄕校)나 서원(書院) 같은 교육기관에서도 철저히 중국의 예법과 제도를 본떠서, 중국의 성현(上國의 귀신)을 최고 상석(主辟)에 모시고, 조선의 위인이나 조상들의 신위(神位)는 그 아래에 배치하여 앉혀 두었다. 이는 자손 대대로 계속 양반 노릇을 하고자 했던 욕심과 사대주의적 사고가 만들어낸 결과였다.
이러한 현상은 아주 이상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충청도의 남쪽 끝 한구석에 있는 산 이름을 공자의 고향 이름과 같은 ‘이구산(尼丘山)’이라고 지었고 그 산 기슭의 고을 이름을 魯城(노성)이라 부르고 '궐리사(闕里社)'라는 건물을 짓고 공자(孔子)의 초상화를 붙여놓고 봄과 가을마다 제사를 지냈다.
* 이 책에서 말하는 '궐리사'는 충남 논산시 노성면에 위치해 있다. '궐리사'는 공자가 성장한 '궐리촌'에서 따온것이며 강원 강릉, 충북 제천, 경기 오산 등지에 있다. 충남 논산에 있는 '궐리사'에는 1717년 숙종 임금 당시 중국에서 가져온 공자(孔子)의 유상(遺像)이 남아있다.

청주 화양동(華陽洞)에는 '만동묘(萬東廟)'라는 사당을 세워놓고 "화양수석(華陽水石)", "대명건곤(大明乾坤)"이라는 글자를 큼직하게 새겨 숭배하였다.
* 만동묘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원군을 보낸 명나라 만력제/신종을 위한 사당이다. 비슷한 시설로 창덕궁 내에 '대보단'이라는 제단이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만동묘는 민간이 대보단은 국가가 조성한 시설이다.
또한, 남양군(南陽郡) 와룡면(臥龍面)에는 제갈공명(諸葛孔明)을 모시는 사당을 지었고, 해주(海州)의 수양산(首陽山)에는 중국의 백이숙제(伯夷叔齊)를 위한 사당을 지어 숭상하였다.
서울 역시 모화관(慕華舘), 연조문(延詔門) 등 곳곳에 중국의 인물과 문화를 모방하여 숭배하는 시설들을 세웠으며 지명에서도 정자천(程子川), 주자천(朱子川), 적벽강(赤壁江), 채석강(彩石江)과 같이 전부 중국의 유명한 지명과 인물 이름을 따서 붙인 흔적이 있다. 이것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대국(중국)을 우러러 보고 그것을 따라한 것임이 분명하다. 이런 사실을 고려하면 평양에 있는 기자묘(箕子廟) 역시 마찬가지로 중국 중심의 사대주의적 사고에서 나온 것임을 부정할 수 없다.
* 모화(慕華) 그릴 '모', 그릴 '화', 즉 중국이나 중국 것을 섬김다는 말이다. '모화관'은 지금 서대문 밖에 영은문(迎恩門)=연조문(延詔門)과 함께 세워져있었다. 고종때 모두 허물었지만 독립문 앞에 영은문의 주초(돌 기둥)가 남아 있다. 독립문(獨立門)은 중국과의 사대를 청산한다는 개념에서 삼전도비 철거와 함께 세워졌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중국과의 독립만을 상징=일본놈들의 주장"하는것이 아닌 "중국 뿐만이 아니라 일본, 러시아, 모든 유럽 열강들로부터의 독립을 상징한다."고 독립신문에 기록되어 있다는것이다.
<해설>
이 단락을 해설하는데 있어 가슴이 답답하다. 조선 사회가 얼마나 철저히 중국 문화에 종속되어 있었는지, 중국의 인물이나 지명을 모방, 무비판적으로 숭배해온것을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종속은 조선의 지배층이 중국을 이상적 모델로 생각한 사대주의(事大主義)의 결과물이다. 물론 혹자는 안정적 외교관계 유지로 평화를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도 말하나 결국 강대국에 대한 맹목적 믿음은 국제 정세에 대한 판단을 흐리게 만들고 스스로 힘을 기르는것을 포기하도록 해 조선을 망하게 만든다.
2025년, 지금 이 땅에도 조선시대와 같은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특히 미국과 일본에 대한 무비판적으로 숭배하며 미국 국기와 일본 국기를 들고 자유와 민주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통곡하고 싶다. 특히 정말 찟어지게 가난한 이들이 힘과 권력을 지닌 자들, 권좌에 앉은 이를 위해 기도하며 추위에 떠는것을 보면 뭐라 설명하기 힘든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답답한 마음, 조선의 위대한 시인이자 풍류객이었던 백호 임제 선생의 유언의 글, 물곡(勿哭)의 글로 마무리 짓는다. 이 글은 여러 버전이 전해지나 내용이 전하는바는 같다.
四夷八蠻 皆呼稱帝 唯獨朝鮮入主中國 我生何爲 我死何爲 勿哭 * 영모정 앞 비석(사진)
"사이팔만이 모두 황제라 칭하는데 조선만이 중국에게서 독립하지 못하였는데 내가 살면 무엇하고 죽으면 무엇이겠느냐 곡하지 말라"
四海諸國, 未有能稱帝者, 獨載邦終古不能, 生於若此 陋邦 其死何足借命, 勿哭 * 나무위키 https://namu.wiki/w/%EC%9E%84%EC%A0%9C
"사해의 여러 나라들이, 황제를 일컬어 보지 않은 나라 없거늘, 우리나라만 예로부터 그래보지 못했다. 이와 같은 나라에 태어났거늘 그 죽는 것을 어찌 애석해할 것 있느냐, 곡을 하지말라"

1894년으로부터 131년 3월 17일 敬天 心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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