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사 - 오지영

#7 유, 불, 선 삼도와 우리 도 (3)

manissky 2025. 3. 20. 12:25

우리 함께 동학(東學) 하십시다!

#7 유, 불, 선 삼도와 우리 도 (3)


<원문>

一(일), 佛教(불교)니, 本教(본교)는 本來(본래) 西天(서천) 西城國(서성국), 至今(지금) 印度國(인도국) 所產(소산)으로 일찍 中國(중국)에 들어와 퍼졌으며, 麗末(여말)에 朝鮮(조선)에 輸入(수입)되어 크게 繁昌(번창)되었다. 佛道(불도)의 宗旨(종지)는 「佛即是心(불즉시심) 心即是佛(심즉시불)」이라 하며, 또한 靈魂個體說(영혼개체설)을 主張(주장)하여 此生(차생)에서 善(선)을 한 者(자)는 天堂(천당)에 가고, 極樂(극락)에 가고, 富貴家(부귀가)에 還生(환생)하고, 惡(악)을 한 者(자)는 地獄(지옥)에 가고, 畜生(축생)이 되고, 貧賤者(빈천자)가 되어 난다 하여 土木(토목)으로써 佛像(불상)을 만들어 놓고 金帛(금백)과 飮食(음식)을 그 앞에 벌여놓고 사람으로 하여금 절을 하고 福(복)을 빌라고 하는 것이다. 이로써 보면 前說(전설)과 後說(후설)이 正反對(정반대)요, 矛盾(모순)이다. 佛(불)이 곧 내 마음이라 할 바에는 또 어디 빌 데가 있단 말인가, 富貴貧賤(부귀빈천)을 다 버리고 世上(세상) 밖에 뛰어나온 사람으로서 또 다시 무엇을 생각한단 말인가, 여기 對(대)하여는 疑惑(의혹)이 滋甚(자심)하도다. 그 教(교)는 兩派(양파)로 分(분)하여, 禪宗(선종) 教宗(교종)이 있다고 하는데 開心見性(개심견성)을 힘쓰니보다 齋(재)밥(재밥)에 精誠(정성)을 드리는 者(자)가 더 많은 듯하다. 原來(원래) 그 教(교)가 靈魂(영혼)을 重視(중시)하고 肉身(육신) 輕視(경시)하여 靑山(청산) 白雲間(백운간)에서 乞食(걸식)을 主張(주장)하느니만치 穀腹問題(곡복문제)에 있어 어찌할 수가 없는 것이다. 肉身(육신)을 너무 輕視(경시)하고, 밥 問題(문제)를 너무 돌아보지 않은 까닭에 모든 病痛(병통)은 여기서 생기었다고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朝鮮(조선)안에 寺刹(사찰)을 보면 八道名山(팔도명산) 어느 곳에 절 없는 곳이 없고, 그 宮室制度(궁실제도)와 粧飾品(장식품)이라든지 其他(기타) 所有山林(소유산림) 川澤(천택)이라든지, 모든 貨物(화물)의 積蓄(적축)이 宛然(완연)한 帝王家(제왕가), 富貴家(부귀가), 權勢家(권세가)의 第一等(제일등) 排償品(배상품)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廣濟衆生(광제중생)이라는 名目下(명목하)에 부처님께 功(공)을 많이 드리면 福(복) 많이 받는다는 主義下(주의하)에 놀고도 잘 먹자는 主義(주의)가 아니고 무엇이냐. 俗談(속담)에 절에 가면 중 노릇을 하고 싶다는 말은 道(도) 닦는다는 것보다 權威(권위)와 豪奢(호사)와 游衣游食(유의유식)에 팔리어 그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정말 大慈大悲(대자대비)의 佛式(불식)이라고 할 것이냐. 아마도 이와 같은 式(식)은 어떠한 俗人輩(속인배)가 僧徒(승도)에 冒入(모입)하여 佛號(불호)를 追崇(추숭)하여 梵王(범왕)이라 稱(칭)하고, 宮殿(궁전)이란 이름을 빌어 淸淨無瑕(청정무하)의 道場(도장)을 흐려놓은 것이 아닌가 하는 疑心(의심)이 없지 않다. 釋迦牟尼(석가모니)가 일찍 王宮(왕궁)을 뛰어나와 山中(산중)으로 逃亡(도망)하던 本意(본의)와는 正反對(정반대)요, 큰 矛盾(모순)이라 하겠다.

 


<현대어>

둘째로 불교(佛敎)에 대해 말하겠다. 불교는 원래 서천(西天), 즉 서성국(西城國)에서 시작된 종교이며, 오늘날의 인도(印度)에서 탄생하여 중국으로 전해졌고, 고려 말에 우리나라로 들어와 크게 번성하였다. 

불교의 가르침은 『부처가 곧 내 마음이요, 내 마음이 곧 부처이다』「佛即是心(불즉시심) 心即是佛(심즉시불)」라는 것이다. 

또한 영혼의 개별적인 존재를 강조하여 이 세상에서 선(善)을 행하면 천당이나 극락에 가거나 부유하고 귀한 집안에서 다시 태어나며, 악(惡)을 행하면 지옥에 가거나 동물로 태어나고 가난한 자가 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런 교리에도 불구하고 나무나 돌로 불상(佛像)을 만들어놓고, 금이나 비단, 음식 등을 그 앞에 차려놓고 사람들로 하여금 절을 하며 복을 빌라고 한다. 이렇게 되면 앞서 말한 교리와 뒤에 말한 실제 행동이 서로 완전히 반대되고 모순된다. 

내 마음이 곧 부처라면 따로 어디 가서 복을 빌어야 하는가? 세상의 부귀영화를 버리고 세상 밖으로 나온 사람들이 어찌 다시 부귀를 탐한단 말인가? 이 점에 대해서는 깊은 의혹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불교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이라 하여 마음을 열고 본성을 깨닫는 것을 중시한다고 하나, 실제로는 마음을 열고 깨닫는 일보다는 제삿밥에 정성을 들이는 사람들이 더 많은 듯하다. * '선종'과 교종은 우선 '깨달음' 이라는것은 동일하나 그 깨달음을 누구나 수행을 통해=선종, 얻거나 불경과 불상 등 교리/경전 공부를 통해 얻는다는 차이가 있다.  그러다보니 꼭 그런것만은 아니지만 선종은 일반 백성들이 교종은 기득권층이 선호했다. 

원래 불교는 영혼을 중시하고 육체를 경시하여 청산(靑山)과 백운(白雲)이 어우러진 곳에서 걸식/구걸/탁발을 하면서 생활하는 것을 주장하기 때문에, 먹고사는 문제에 있어서 현실적으로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 없다. 육신을 너무 경시하고 먹고사는 문제를 소홀히 여기다 보니, 이로 인해 각종 문제와 병폐가 생겨났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실제로 조선 팔도의 명산을 보면 절이 없는 곳이 없으며, 그 절의 규모와 장식은 물론이고 소유한 산림이나 하천, 물건과 재물 등은 마치 제왕의 집이나 권세가, 부유한 집안의 사치스러운 장식과 크게 다르지 않을 정도로 호화로운 것이다. 중생을 널리 구제한다는 명목으로 부처에게 많은 공덕을 바치면 복을 더 많이 받는다는 주의 아래, 놀고 먹자는 주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속담에 "절에 가면 중 노릇 하고 싶어진다"고 했는데, 이는 진정한 수행보다 절의 권력과 화려함, 편하게 놀고 먹는 생활을 부러워하여 하는 말이 아니겠는가? 과연 이것이 부처님의 크나큰 자비심에서 나온 참된 불교의 모습이라 할 수 있는가?

이런 현상은 아마도 어떤 속된 사람들이 승려의 무리 속에 섞여 들어와 부처의 이름을 빌려 자신을 마치 범왕(梵王)처럼 숭상하고, 청정해야 할 도장(道場)을 궁전이라는 이름으로 꾸미고 더럽힌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석가모니가 처음 왕궁을 뛰쳐나와 산속으로 들어갔던 본래의 뜻과 정반대로 가는 큰 모순이 아닐 수 없다.


<해설>

이번 단락 역시 유교에 이어 조선 후기 불교의 문제점에 대한 오지영 선생의 생각이 담겨있다. 그러면서 '깨달음'의 불교 본연의 자리로 돌아갈것을 촉구하고 현실을 외면한 관념적 차원에 머물지 말고 현실에 관심을 기울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그리고 동학과 불교는 사실 오지영 선생의 동학사와 별개로 관계가 깊은면이 있다. 

그럼 여기서 궁금증이 생기실것이다. 정말 동학은 유교, 불교, 기독교를 섞은것인가? 그렇지 않다는것을 지금 오지영 선생께서 설명하고 있다는것을 기억하시기 바란다. 그리고 '道則同也(도칙동야)나 里則非也(리칙비야) - 도는 같지만 그 이치는 다르다'는 말씀을 기억해주시면 좋겠다. 

최근의 불교에 대해 여러 모습이 있지만 조금 관심을 가져 본다면 '출가자 감소'에 대해 설명 드리고 싶다.  관련 기사 : "출가자 10년 새 ⅓로…조계종 '힙한 불교'로 위기 극복 안간힘" https://www.yna.co.kr/view/AKR20250127042300005 를 살펴보면 지난 해(2024년) 조계종 출가자가 81분으로 나온다. 

출가자 감소는 불교만이 아닌 탈종교화와 맞물려 모든 종교계 겪고 있는 문제이며 종교인의 숫자도 급격하게 줄고 있다. 유럽과 미국의 경우에도 종교인 감소로 인해 성당 등을 개조, 나이트클럽이나 레스토랑, 마을 공동체 시설로 운영하고 있다. 이에 반해 사람들의 영성(靈性)에 대한 관심은 전 세계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명상, 요가, 마음 수련, 템플스테이, 성지 순례 등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기독교인이라 하더라도 산사를 찾아 고요함을 즐기고 스님을 만나 차담을 나눈다. 불교인은 성탄절을 함께 축하하며 연말을 보낸다. 

종교는 믿음의 영역이다. 아는것(지식)이 믿음과 동일하지 않다는것을 말씀드리며 이 단락을 마무리 하겠다. '믿음'에 대한 설명은 다음 장의 '야소교'에 대한 오지영 선생의 생각을 알아본 다음 설명드릴 수 있도록 하겠다. 하지만 이 단락에서 꼭 드리고 싶은 이야기라면 조선 말기 어떤 사상도, 어떤 종교도 피폐한 조선 민중을 어루만져주지 못했다는것이다. 그리고 2025년 대한민국에서도 역시 그러하다. 


1894년으로부터 131년 3월 20일 敬天 心告


여기서 잠깐 원불교(圓佛敎)는? 이라는 궁금증이 있으실것이다. '원불교'는 세계불교도우의회/세계불교협회( 참고링크 https://wfbhq.org/regional-centres.php?c=013000034 ) 에 이름이 들어가 있다. 그럼 원불교는 불교인가? 덧붙여 드리고 싶지만 부족한 공부로 말씀드리기 어렵다. 구글에 "원불교는 불교인가"를 입력해 관련된 내용을 확인하시면 좋겠다. 관련된 논의가 많이 나올것이다. 

덧붙여 우리 사회에도 수 많은 교회, 종교 시설들이 있다. 이 시설들을 모두가 함께 사용 할 수 있는 공동체 공간으로 활용했으면 하는 생각이 있다. 종교의 권위성을 앞세우기 보다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공간으로 열어주었을때 모두에게 도움이 될수 있을것이다. 이미 그렇게 사용하는 곳도 있다. 하지만 좀 더 확대하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일례로 많은 예산을 들인 새 건물보다 마당도 넓고 조용한 시골 교회내에 작은도서관을 세운다면 그 어느곳보다 안전하고 가까운 공간에서 우리의 아이들은 마음껏 책도 읽고 뛰어 놀수도 있을것이다. 이미 많이 하고 있는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