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함께 동학(東學) 하십시다!
#8 포덕과 조난 (1)
<원문>
水雲先生(수운선생)은 辛酉年(신유년)부터 癸亥年(계해년)까지 三年(삼년)동안에 道(도)를 펴서 사람을 가르치니 이때 慶尙(경상), 全羅(전라), 忠淸(충청), 三道(삼도)의 間(간)에서 先生(선생)을 從遊(종유)하는 者(자)가 자못 數萬人(수만인)에 달한지라 이 소문이 朝野(조야)에 振動(진동)되어 크게 指日(지일)이 생기었다. 政府(정부)에서 宣傳官(선전관) 鄭龜龍(정구룡)이 慶州(경주)에 내려와 御命(어명)으로 先生(선생)을 逮捕(체포)하여 大邱監營(대구감영)으로 移囚(이수)하였었다.
그때로 말하면 마침 西學(서학, 천주교)하던 사람들을 잡아 죽이던 때였었다. 그리해서 先生(선생)을 또한 西學(서학)으로 몰아 잡아간 것이다. 이때 慶尙監司(경상감사) 徐憲淳(서헌순)이 嚴刑(엄형)으로 審問(심문)하였었다.
監司(감사) 물어 曰(왈) "네 邪道(사도)로써 民心(민심)을 어지럽게 하니, 그 罪(죄) 가장 重大(중대)하다." 先生(선생) 曰(왈) "무엇을 가르쳐 이름이뇨." 監司(감사) 曰(왈) "네 所謂(소위)하는 道(도)는 西學(서학)이 아니냐." 先生(선생) 曰(왈) "아니라, 나의 하는 바 道(도)는 天道(천도)라, 東에서 生(생)하여 東(동)에서 學(학)하니 東學(동학)이라면 오히려 可(가)하려니와, 西學(서학)이라 함은 可(가)치 않다." 監司(감사) 曰(왈) "네 만일 天道(천도)라 이를진대, 어찌 朝鮮由來(조선유래)의 하던 儒道(유도)로써 하지 아니하고 天主(천주) 二字(이자)로써 하나뇨." 先生(선생) 曰(왈) "天主(천주) 二字(이자)가 비록 西學(서학)과 같다 하나 그 理致(이치)인즉 西學(서학)과 같지 않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監司(감사)는 말하되, "東學(동학)이고 西學(서학)이고를 莫論(막론)하고, 儒道(유도)의 系統(계통) 밖에는 모두가 異端(이단)이오, 邪道(사도)가 아니냐"고 號令질(호령질)을 하며, 先生(선생)을 잡아 刑(형)틀 위에 앉히고 猛杖(맹장)을 내리었다. 이때 瞥眼間(별안간) 霹靂(벽력)같은 소리가 宣化堂(선화당) 屋宇(옥우)를 震動(진동)시키는지라, 監司(감사) 놀라 물어 曰(왈) "이 무슨 소리뇨." 羅卒(나졸)들이 對答(대답)하여 曰(왈) "罪人(죄인)의 다리가 부러지며 울리는 소립니다." 監司(감사)가 像(상을) 찌푸리며 曰(왈) "그러면 그 罪人(죄인)을 때리지 말고 다시 獄(옥)에 내려 가두라." 하였다.
數日(수일)이 지난 後(후)에 監司(감사)가 또 다시 罪人(죄인)을 올리라 하여 審問(심문)을 繼續(계속)할 제 부러진 다리를 살피어 본즉, 그 다리가 부러진 痕跡(흔적)도 없이 되었는지라, 監司(감사) 以下(이하) 大小官吏(대소관리)며 奴令(노령)들까지라도 모두 보고 놀라지 않는 者(자)가 없었다. 이로부터 監司(감사)는 다시 刑(형)을 더 하지 아니하고 問招(문초) 받은 것을 거두어 政府(정부)에 報告(보고)하고 서울로 押送(압송)하였던 바, 政府(정부)에서는 다시 大邱監營(대구감영)으로 미루어 先生(선생)을 邪道罪(사도죄)로 몰아 死刑(사형)에 處(처)하였다.
그때로 말하면 朝鮮(조선) 안에는 儒道(유도)나 佛道(불도) 以外(이외)에는 모두가 異端(이단)이오, 邪道(사도)라 하여 다 목을 끊어버리는 때라 어찌 能(능)히 죽기를 免(면)할 수가 있으랴. 先生(선생)은 할 수 없이 刑(형)을 받아 大邱(대구) 將臺(장대) 觀德亭(관덕정) 아래서 머리를 베게 되었었다. 이때 監司(감사)는 將臺(장대) 위에 높이 앉아 號令(호령)을 내리고 八十名(팔십명) 羅卒(나졸)들은 聽令(청령)소리를 높이 띄우고 揮刺手(휘자수, 執劍者(집검자))들은 左右(좌우)로 갈라서서 行刑(행형)을 하게 되었는데 시퍼런 칼날이 두 세번 목에 들어가도 先生(선생)의 목은 如前(여전)히 베어지지 아니하였다.
揮刺子(휘자자)놈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監司(감사)에게 아뢰인다. "이 칼이 罪人(죄인)의 목에 들어가도 살이 베어지지 않으니 惶恐無地(황공무지)하옵나이다." 監司(감사)는 이 말을 듣고 크게 걱정하여 몸소 뜰 아래 내려와 恭順(공순)히 말하여 曰(왈), "이 일은 나의 私事(사사)가 아니고 王命(왕명)이니 願컨대 先生(선생)은 그 命(명)을 順(순)히 받으소서."
先生(선생)이 曰(왈) "나의 하는 바 道(도)는 나의 私心(사심)이 아니오, 天命(천명)이니 巡相(순상)은 그 뜻을 아소서. 오늘날은 巡相(순상)이 비록 나를 죽이나 巡相(순상)의 孫子代(손자대)에 가서는 반드시 내 道(도)를 쫓고야 말리라." 하며 무엇을 생각하는 듯하더니 마침내 命(명)을 마치니, 이날은 甲子(갑자) 三月(삼월) 十日(십일)이라 白日靑天(백일청천)에 雷雨(뇌우)가 蕭蕭(소소)히 내리고 日月(일월)이 또한 빛을 잃어버렸더라.
이때 先生(선생)의 屍身(시신)은 弟子中(제자 중) 여러 사람들이 거두어 慶州(경주) 龍潭(용담) 後麓(후록)에 埋葬(매장)하였다. 先生(선생)의 屍身(시신)을 運搬(운반)하여 가던 途中(도중) 五色(오색) 무지개가 棺(관) 위에 떠 있으며, 慈仁縣(자인현) 後淵店(후연점)에서 一夜(일야) 동안을 經過(경과)하던 中(중) 屍身(시신)을 다시 살펴보니, 머리와 몸이 合(합)한 곳에 붉은 줄이 둘렀으며, 얼굴빛이 宛然(완연)히 산 사람의 形像(형상)과 같아, 三日(삼일)이 지난 後(후)에야 비로소 變色(변색)이 있어서 그제야 安心(안심)하고 安葬(안장)하였다고 한다.
<현대어>
수운 선생은 신유년(1861년)부터 계해년(1863년)까지 약 3년 동안 자신의 도(道)를 널리 알리고 사람들을 가르쳤다. 이때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의 세 지역을 중심으로 선생을 따르는 사람들이 수만 명에 달했고, 이에 대한 소문이 나라 전체에 퍼져 조선 정부의 큰 주목을 받게 되었다.
마침내 정부에서는 선전관 정운구(원문은 정구룡)을 경주로 보내 수운 선생을 체포하여 대구 감영으로 이송하였다. 그 무렵 정부에서는 서학(천주교)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 처형하는 사건이 한창이었는데, 수운 선생 또한 서학(西學)을 퍼뜨린다는 이유로 붙잡히게 된 것이다.
이때 경상감사 서헌순은 선생을 매우 엄하게 심문하였다.
감사가 물었다.
"너는 사악한 도(邪道)로 민심을 혼란스럽게 했으니, 그 죄가 매우 중대하다."
선생이 답했다.
"무엇을 가르켜 말하는 것인가?"
감사가 말했다.
"네가 말하는 도는 서학(西學)이 아니냐?"
선생이 답했다.
"그렇지 않다. 내가 행하는 도는 하늘의 도(天道)이다. 동쪽에서 생겨났고, 동쪽에서 배웠으니 '동학(東學)'이라 한다면 모를까, 서학이라 하는 것은 옳지 않다."
감사가 다시 말했다.
"네가 말하는 도가 정말 천도(天道)라면, 왜 조선에서 오랫동안 이어져 온 유교(儒敎)를 사용하지 않고 하필 천주(天主)라는 말을 쓰느냐?"
선생이 답했다.
"비록 천주라는 단어가 서학에서 쓰는 말과 같다고 할지라도, 그 의미와 이치는 서학과 같지 않다."
그러자 감사가 말했다.
"동학이든 서학이든 따질 필요 없다. 유교의 계통 밖의 것은 모두 이단이고 사악한 도(邪道)가 아니냐!"
그리고는 크게 호통을 치며 수운 선생을 형틀에 앉히고 몽둥이로 심하게 때렸다.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천둥소리 같은 굉음이 감영(선화당)의 건물을 흔들었다. 감사가 놀라 물었다.
"이게 무슨 소리냐?"
나졸들이 답했다.
"죄인의 다리가 부러지면서 나는 소리입니다."
감사는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렇다면 더 이상 때리지 말고 다시 옥에 가두어라."
며칠 뒤 감사가 다시 수운 선생을 불러 심문을 이어갔다. 그런데 살펴보니 부러졌던 다리에 아무런 상처도 남아 있지 않자, 감사와 관리들, 심지어 하인들까지 이를 보고 놀라워하였다.
이후 감사는 더 이상 형벌을 가하지 않고, 수운 선생을 서울로 압송하여 정부에 보고하였다. 하지만 정부는 다시 사건을 대구로 돌려보내, 결국 선생을 사도(邪道)의 죄명으로 사형에 처하기로 하였다.
그 당시 조선은 유교와 불교 이외의 모든 가르침을 사악한 도라 하여 엄하게 처벌하고 있었기 때문에 수운 선생 또한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결국 수운 선생은 대구의 장대(지휘소) 관덕정(활터) 아래에서 참수형을 당하게 되었다.
집행 당일, 감사는 높은 자리에 앉아 명령을 내렸고, 80명의 군졸들이 큰 소리로 명령을 외치며, 집행자들이 양쪽에서 칼로 선생의 목을 내리쳤다. 하지만 두세 번이나 시퍼런 칼날이 목에 들어가도 수운 선생의 목은 잘리지 않았다.
형 집행자들이 땀을 흘리며 감사에게 말했다.
"칼이 죄인의 목에 닿아도 잘리지 않으니 황송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감사는 크게 당황하여 직접 자리에서 내려와 정중하게 말했다.
"이 일은 나의 사사로운 뜻이 아니라 임금님의 명령이니, 부디 순순히 명을 받아주소서."
그러자 수운 선생은 말했다.
"내가 행하는 도(道)는 나의 개인적 욕심이 아니라 하늘의 명령이니, 감사께서도 그 뜻을 알아주시오. 오늘 감사가 비록 나를 죽인다 하더라도, 장차 당신의 손자 세대에서는 반드시 내 도를 따르게 될 것이오"
그리고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마침내 명을 마치었다. 이 날은 갑자년(1864년) 3월 10일로, 밝은 대낮에 천둥번개가 치고 비가 슬피 내렸으며, 해와 달이 그 빛을 잃었다고 전한다.
수운 선생의 시신은 제자들이 거두어 경주 용담 뒷산에 장례를 치렀다. 시신을 옮기는 도중 오색 무지개가 관 위에 떠 있었다. 자인현(경북 경산시 자인면)에서 하루를 머물렀을 때 시신을 다시 살펴보니, 목과 몸이 이어진 부분에 붉은 선이 둘러져 있고, 얼굴이 마치 살아있는 사람처럼 생생하였다. 그렇게 3일이 지나서야 비로소 시신의 얼굴색이 변하였기에, 그제서야 안심하고 매장하였다고 전한다. (계속)
<해설>
포덕과 조난의 장은 오지영 선생께서 수운 대신사의 피체와 순도하시기까지의 일련의 과정을 '승정원일기'와 '비변사등록' 즉, 조선 중앙정부의 자료와 대선생주문집(大先生主文集) https://www.e-donghak.or.kr/archive/?menu=132&mode=view&code=prd_0158r_001#top001 '최선생문집 도원기서'등의 동학 관련 자료 등을 참고한것으로 보인다. * 오지영 선생께서 이 책들을 참고하셨다고 기록을 남기지 않으셨다. 글쓴이의 생각이다.
승정원은 요즘과 비교하면 대통령 비서실이나 국정상황실, 비변사는 국가안전보장회의나 국가안보실이며 대선생주문집(大先生主文集)은 저자 미상이나 영해 사람 박하선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최선생문집 도원기서'는 강수/강시원 차도주께서 해월 최시형 신사의 감수를 받아 여러 어른신들과 함께 작성한 책이다.
조선 중앙정부의 기록에 남아 있는 '동학'의 최초 보고는 1863년(철종 14년/고종 즉위년) 음력 12월 20일 승정원일기이다. https://sjw.history.go.kr/id/SJW-K00120200-01900 다만 오지영 선생께서 '동학사'를 쓰실때 기록과 달리 이름이 달리쓰거나 날짜가 다르거나 하는 오류가 있으나 큰 맥락에서 읽어가시길 바란다. 아쉽지만 '도원기서'를 직접 읽을 수 있는 인터넷 사이트는 현재 찾지 못하고 있다. (곧 내가 새로운 카테고리를 만들어 이 블로그에 업로드 할 계획이다.)
1894년으로부터 131년 3월 31일 敬天 心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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